창세기 성경강해 노아의 후손
10장: 노아의 자손들
[1-4절]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본장은 세계 민족들의 기원에 대한 개요이다. 노아의 세 아들들 중 야벳의 아들은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이었다. 고멜은 킴메리아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터어키 북부에 거주했고 후에는 지금의 불가리아로 이주하였다. 마곡은 스구디아인의 조상이며 흑해 동쪽에 거주했고, 마대는 메데인의 조상이며 카스피 해 남부 즉 지금의 이란에 거주했다. 야완은 이오니아인의 조상이며 발칸 반도 남부 즉 지금의 그리스에 거주했고, 두발은 이베르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터어키 동부에 거주하였다. 메섹은 갑바도기아인의 조상이며 흑해 남부에 거주했고 러시아인이 여기서 나왔고, 디라스는 아마 드라키아인의 조상이며 소아시아 서북부에 거주하였다.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 리밧, 도갈마이었는데, 아스그나스는 소아시아 북부, 본도와 비두니아 지역에 거주했으며 그곳의 호수와 항구는 아스카니어스라고 불리었고, 리밧도 같은 지역에 거주했고, 도갈마는 소아시아 중앙의 브루기아과 갈라디아 지역이나 아르메니아 지역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 달시스, 깃딤, 도다님이었는데, 엘리사는 그리스 지역에 거주했던 것 같고, 달시스[다시스]는 이태리 서쪽이나 소아시아 동남부에 거주했던 것 같고, 깃딤은 구브로 섬(키프로스 섬)에, 그리고 도다님은 그리스 동북부에 거주했던 것 같다.
[5절]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라숀)[언어]21)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5절까지를 요약하면, 야벳 자손들은 처음에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어키 북부에 거주했고, 후에 북쪽과 서쪽으로 즉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바닷가의 땅’이라는 말은 지중해 연안과 그 섬들을 가리킨다.
[6-7절]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함의 아들들은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이었는데, 구스는 이디오피아와, 아라비아 서부에 거주하였고, 미스라임은 지금의 이집트에 거주했고, 붓은 아프리카 북쪽 즉 지금의 리비아에 거주했던 것 같다. 거기에는 붓이라는 강이 있었다. 가나안은 팔레스틴 곧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다.
구스의 아들들은 스바, 하윌라, 삽다, 라아마, 삽드가이었는데, 스바 [세바]는 이디오피아의 홍해 가까이에 거주하였고, 하윌라는 이디오피아 동북부에 거주했던 것 같고, 삽다는 아라비아 남부에, 라아마는 아라비아 남부와 서부에, 삽드가는 아라비아 남부에 거주하였던 것 같고, 라아마의 아들 스바[쉐바]는 아라비아 남부에, 드단은 아라비아 서부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8-9절]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구스는 또 니므롯을 나았는데 그는 세상의 처음 영걸이었다. ‘영걸’이라는 원어(깁보르)는 ‘용사’라는 뜻이다. 또 ‘특이한 사냥꾼’이라는 원어(깁보르 차이드)는 ‘사냥하는 용사’라는 뜻이다.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그의 탁월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님과 겨루듯이 자기를 높이는 그의 교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니므롯’이라는 원어는 ‘우리는 반역하리라’는 뜻이다. 니므롯은 단지 짐승 사냥꾼이 아니고 그 이름처럼 사람들과 나라들을 사냥하는 정복자이었고 고대에 나타난 강력한 권력자이었던 것 같다.
[10-12절]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니므롯은 바벨, 에렉, 악갓, 갈레, 니느웨, 르호보딜, 갈라, 레센 등의 성을 건축하였다. 바벨은 지금의 이라크의 알 힐라 지역이며, 에렉은 바벨에서 동남쪽 200km 지역이며, 악갓은 지금의 이라크의 바그다드 지역이다. 또 레센은 큰 성이라고 증거되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뿌리가 되는 시날 땅의 여러 성들은 본래 셈족에 의해서가 아니고 함족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그의 나라[왕국]’(마믈라크토)라는 표현은 니므롯의 나라가 옛 바벨론 제국이라고 불릴 만했음을 보인다. 그 제국의 특징은 본문과 다음 장 창세기 11장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힘과 교만이었던 것 같다. 또 힘과 교만의 사회는 폭력과 악과 압제의 사회가 된다. 그것은 사랑과 겸손, 선과 배려와 희생과 구제 같은 덕을 가진 사회와는 다르다. 교만과 힘의 사회는 부패하여 결국 멸망하고 만다. 그들은 높은 탑을 쌓으며 단합을 추구하였지만, 언어의 혼잡으로 결국 그 꿈은 실패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13-14절]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미스라임의 아들은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 북부에 거주하였고 아프리카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 중에 가슬루힘의 자손은 팔레스틴의 서남부에 거주하여 블레셋 사람이 되었다.
[15-20절]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이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이었더라.
가나안의 아들들은 열 한 개의 종족들을 이루었다. 앞장의 노아의 예언에서와 본장의 고대 민족들의 이름들에서, 가나안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창세기가 모세의 글임을 증거한다. 본문은 가나안 지경이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이었음을 증거한다. 가나안에 있는 종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었다. 또 19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언급한 것은 본 기록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의 상황을 나타낸다. 모세는 이런 성들을 입으로 전해오는 말로나 기록물들을 통해 또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알았을 것이다. 또 그는 가나안 족속들과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이 우상숭배나 음행으로 심히 부패하여 마침내 멸망하게 될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요약해보면, 함의 자손들은 아프리카의 북부와 북동부, 즉 오늘날 리비아, 이집트, 이디오피아 등에 거주했고 또 일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 땅에도 거주했다.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 대륙에 퍼져 살았고 아프리카인들이 되었다고 보인다.
[21-30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야벳의 동생(원문 액센트, KJV, NIV)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었다. 에벨 자손은 히브리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창세기 14:13은 최초로 아브라함을 ‘히브리(이브리) 사람’이라고 불렀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원어는 ‘에벨(에베르 ר������������)의 자손’이라는 뜻일 것이다. 또 히브리어 에베르는 ‘건너편의 땅’이라는 뜻이므로 그 말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서 온 아브라함에게 적합했다(창 11:31; 12:5).
셈의 아들은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이었다. 엘람은 엘람인 즉 파사인의 조상이며 페르샤만 북서쪽, 지금의 이란 지역에 거주했다. 앗수르는 앗수르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거주했고, 아르박삿은 아마 갈대아인의 조상이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하류에 거주했던 것 같다. 룻은 리디아인의 조상이며 소아시아 서남부에 거주했고, 아람은 아람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거주했다.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이었다. 우스는 에돔 북쪽에 거주했고, 훌은 아르메니아 지역에 거주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고 그때 세상이 나뉘었다. ‘세상이 나뉘었다’는 말은 다음 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의 언어들이 혼잡되어 그들이 각 종족과 각 언어대로 온 땅에 흩어진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고대에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벨렉의 아우 욕단은 아라비아 남부의 원주민들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열 세 명의 아들은 아라비아 중남부의 종족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보인다. 그들의 거주지는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의 남부와 예멘 지역이다.
[31-32절]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世系)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요약해보면, 셈의 자손들은 팔레스틴 북쪽과 메소포타미아 동쪽, 그리고 팔레스틴 남쪽의 아라비아 지역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동쪽 아시아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동양 민족들은 셈족에 속할 것이다.
본장은 세계 민족들의 기원에 대한 개요이다. 노아의 세 아들들은 인류의 삼대 인종을 형성하였다. 즉 야벳의 자손은 유럽에 거주하는 백인종을, 함의 자손은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흑인종을, 셈의 자손은 아시아에 거주하는 황인종을 형성했다고 보인다. 노아의 예언대로, 야벳의 자손들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창했고, 함의 자손들은 많은 고난을 당했고, 셈의 자손들은 종교적 복을 얻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셈의 자손으로 오셨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경은 인류 초기의 중요한 역사를 담은 책이다. 성경의 내용이 역사가 아니고 신화라면, 본장과 같은 부분들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성격을 깨닫고 본장뿐 아니라, 모든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진지하게 받고 믿자.
둘째로, 우리는 함의 자손의 번창과 몰락을 보자. 함의 자손 니므롯은 고대에 강력한 통치자이었고 그의 왕국은 매우 광대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 이유는 교만과 폭력과 부도덕 때문이었다. 마지막 때에도 적그리스도와 독재자의 출현이 예상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멸망할 것이다(살후 2:3-8). 우리는 이 멸망할 세상 나라에 소망을 두지 말자.
셋째로, 인류는 모두 아담의 자손이며 또한 노아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한 가족같이 생각하고 귀히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는 복을 받을 자들과 멸망할 자들로 나뉠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을 모르고 구주 예수님을 모르고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에 던지울 자들이 있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실천하다가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있다(요 3:36; 벧후 3:8-13; 계 21:1-8). 여러분은 그 둘 중 어느 쪽인가?
11장: 연합과 분리
[1절] 온 땅의 구음(口音)[언어]이 하나이요 언어[말]가 하나이었더라.
오늘날 세계에 3,000개 정도의 언어가 있고 그 중에 5천만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19개라고 한다.22) 그러나 본래 아담의 자손들과 노아의 자손들은 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2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과 그들에게서 난 자손들은 ‘동방으로’ 이동했고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시날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중하류의 평지로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평원, 즉 오늘날 이라크의 동부이다. 바벨은 이라크의 알 힐라이다.
[3-4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城)(이르)과 대(臺)(믹달)[탑]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시날 평지에 거하며 벽돌을 잘 굽고 역청을 접착제로 사용하여 큰 성과 높은 탑을 만들려 했다. 사람의 지혜는 뛰어났다. 바벨탑 건립은 아마 니므롯이 주도하여 행하였을 것이다. 바벨 남쪽 유브라데스 강 서편 언덕에 흔적이 남아 있는 빌스 니무룻이라는 명칭의 일곱 층계로 된 탑이 이 탑의 유적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노아의 자손들이 성과 탑을 건립하고자 했던 동기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 그러나 사람이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받았지만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이다(시 115:16).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생각은 실상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겸손히 자신들과 하나님 간의 무한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하나님과 견주려 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을 나타낸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 가장 근본적인 큰 죄악이다. 사람은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만 높이며 자랑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지지 않으려 하였다. 연합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도 니므롯이 주도하였을 것이다. 불경건과 교만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연합은 폭군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그들의 시도는 전체주의적 사회를 지향하였을 것이다. 전체주의란 개인의 모든 활동이 국가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역사상 독재 국가들에서 볼 수 있었던 생각이다. 그런 연합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
일반적으로, 연합은 선하고 좋으며, 분열은 악하고 나쁘지만, 강제적 연합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무시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 그런 연합 아래서는 개인의 사유재산권과 신앙의 자유가 부정된다. 무신론적 전체주의 사회는 무서운 괴물과 같다. 우리는 주의 재림 직전에 적그리스도적 세계 통합과 교회 통합으로 전체주의적 국가와 교회가 나타나리라고 예상한다(계 13:7, 12, 16-17).
참된 연합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연합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고 진리와 의 안에서 이루어질 때만 좋은 것이다. 진리와 거짓, 의와 불의, 선과 악은 섞이기보다는 분리되어야 한다. 불경건과 교만으로 연합하기보다는 차라리 분리된 상태로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 거기에는 최소한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자유로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된 연합은 경건과 의와 진실, 겸손과 사랑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5-9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본주의적 연합 추구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의 일을 악하다고 판단하셨다. 그는 오늘날도 참된 진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연합운동을 미워하신다. 그는 내려오셔서 그들의 하는 일을 보셨다. 그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또 그는 그들이 언어가 하나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심으로 그 일을 중단케 하셨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 사람이 아무리 큰 일을 계획해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면 헛되게 될 것이다.
[10-26절]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100세 곧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5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낳았고 에벨을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고 벨렉을 낳은 후에 43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벨렉은 30세에 르우를 낳았고 르우를 낳은 후에 20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르우는 32세에 스룩을 낳았고 스룩을 낳은 후에 2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스룩은 30세에 나홀을 낳았고 나홀을 낳은 후에 2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나홀은 29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를 낳은 후에 11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세기 7:11에 홍수가 노아 600세 2월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므로 셈은 노아가 502세 때에 낳은 아들이라고 보인다. 본문은 셈의 자손에 대해 말한다. 성경 역사는 하나님께서 셈의 자손 중에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으로 흘러 내려간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홍수 후 셈의 자손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초산 연령이 낮아졌다. 창세기 5장의 아담의 자손의 기록과 달리, 본문에서는 초산 연령이 전부 35세 이하이며 대부분 30세 전후이다. 둘째로, 수명(壽命)이 점점 줄어들었다. 홍수 전에는 사람이 보통 900세 이상 살았으나, 홍수 후에는 현격히 줄어 데라의 아버지 나홀의 수명은 149세이었다. 노아 시대 대홍수 때 하늘의 대기층에 변화가 일어났고 태양 광선의 많은 유입으로 노화(老化)가 촉진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26절]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원문은 창세기 5:32와 같이 “데라가 70세가 된 후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는 뜻이다. 27절과 29절에 보면, 하란은 결혼하여 롯과 밀가와 이스가를 낳았고 그 중에 밀가는 삼촌인 나홀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면, 데라의 세 아들은 아브람, 하란, 나홀 순서일 것이며, 또한 하란과 나홀의 나이 차이도 컸을 것이다. 데라의 연대는 아담 후 1878-2083년경이며, 아브라함의 연대는 만일 데라가 그를 70세에 낳았다면 아담 후 1948-2123년경이다.
[27-30절]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와 그 아들들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오늘날 이라크의 나시리야에서 서쪽으로 10여km 떨어진 텔 엘-무카야르로 추정된다. 갈대아 우르는 옛 시대에 문명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당시에 중산층의 집은 열 개 내지 스무 개의 방이 있는 이층집이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은 읽기와 쓰기와 산수를 공부하였고 곱셈과 나눗셈, 심지어 제곱근과 세 제곱근도 공부하였다.23)
데라의 아들 하란은 그 아버지보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 데라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불행한 일을 경험해야 했다. 또 그의 아들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바꿈)은 아내가 자녀를 잉태치 못하였다. 그것도 아버지 데라에게 큰 근심거리이었을 것이다.
[31-32절]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205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24)
데라와 그 일행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었다. 창세기 15: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고 말씀하셨다. 느헤미야 9:7도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마 아브람에게 어떤 계시를 주셨고(행 7:2)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를 설득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어떤 이유인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다. 그가 중도에 주저앉고 만 것은 그의 연약 때문이었을 것이다. 갈대아 우르나 하란은 우상숭배적 환경이었다(수 24:2; 창 31:19; 35:2-4).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잘못된 연합 활동을 반대해야 한다. 노아의 자손들이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은 것은 잘못된 연합 활동, 인본주의적 연합 활동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에서 나온 생각이며 활동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인간의 교만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만에서 나온 바벨탑 쌓는 일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 일을 중단시키셨다.
인본주의에 입각한 현대 과학과 문명은 바벨탑 쌓는 일이다. 인류는 또 다시 인간 만세를 부르고 있다. 사람들은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같이 생각한다. 인간의 삶 속에 더 이상 하나님께서 계실 곳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삶에는 인간의 목적도, 죄 문제나 죽음 문제의 해결도 없다. 교만한 세상에는 허무함만이 가득하다.
성경의 예언대로, 말세를 당해 많은 교회들이 잘못된 연합을 추구하고 있다. 교회들은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변질된 천주교회를 용납하고 심지어 이방종교들도 포용하려 한다. 보수적인 교회들조차도 이런 넓어진 교회들을 분별하고 배격하지 않고 교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은 성경에 밝히 계시된 교제의 교훈을 어기는 잘못된 연합이다. 우리는 그런 연합을 반대하고 그런 일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거룩한 분리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자손들 중에서 셈의 자손을 구별하셨다. 또 그는 셈의 자손들 중에서 데라를 구별하셨고 또 데라의 아들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함)을 구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데라와 그 아들 아브람 부부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셨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환경으로부터의 분리이었다. 우리는 갈대아 우르 같은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 운동은 분리 운동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와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또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불신자들과의 분리를 밝히 가르치고(고후 6:14-17), 이단들과의 분리를 밝히 가르치고(딛 3:10; 요이 7-11), 또 바른 교훈을 버리고 불순종하는 자들과의 분리를 밝히 가르친다(롬 16:17; 살후 3:6, 14). 신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간에 서로 사랑하라고 밝히 가르치지만, 동시에 불신자들, 이단자들, 바른 교훈을 버리거나 불순종하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도 밝히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분리를 실천해야 한다.
12장: 아브람을 부르심
창세기 1-11장은 인류의 초기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12-50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에 대해 서술한다.
1-9절, 아브람을 부르심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을 통해서도 자신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시고 역사를 통해서도 자신의 공의의 통치를 나타내시지만,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책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과 규범이 된다.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나 제2의 고향인 하란은 우상숭배의 땅이었다(수 24: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이다. 그를 부르신 때는 그가 하란에 거하였을 때인 것 같다. 성경 다른 곳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셨다고 말한다(창 15:7; 느 9:7).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에게 어떤 암시를 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를 본격적으로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한 경건한 민족을 만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은 분리의 시작이었다. 데라는 분리를 위한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이제, 아브람에게 분리된 삶, 성별된 삶이 필요했다. 나이 든 친척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아브람이 죄악된 전통과 풍습을 완전히 떠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새 가문의 시작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한 큰 민족을 만들기를 원하셨고 그들에게 한 땅을 주기를 원하셨다.
[2-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복을 약속하셨다. 그는 아브람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이 크게 되게 하고 그가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복의 근원’이라는 원어(베라카)는 ‘복’이라는 뜻이다. 아브람은 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은 창세기 22:18에서와 이삭(창 26:4)과 야곱(창 28:14)에게서도 반복된다.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아브라함과 다윗을 이어서 내려왔다. 메시아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실 뿐 아니라,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예언되었다(렘 23:5; 겔 34:23; 호 3:5). 신약성경 마태복음 1:1은 메시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를 통하여 구원의 복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값없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얻는 것이다.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75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가지 말라 하시면 가지 않는 것이 순종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라 명하실 때 떠났다. 그는 우상숭배의 삶을 청산하였다. 그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마땅한 삶이었다.
롯도 아브람과 함께 갔다. 롯이 아브람과 동행한 것을 보면, 그는 아브람의 영향으로 비교적 경건하였던 것 같다. 베드로후서 2:7-8은 롯을 의로운 자라고 증거한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이었고 아마 그의 부친 데라가 죽기 전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11:26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다고 말하므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부친 데라는 145세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11:32에 데라가 205세까지 살고 하란에서 죽었다고 기록한 것은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역사를 기술할 때 데라에 대해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아브람에 대해 쓰는 기술 방식 혹은 습관이었다.25)
[5-6절]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테레빈스 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라는 표현은 그가 하란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았던 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는 정들었던 그의 모든 환경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목표는 분명하였고 그는 그 목표대로 그 땅에 들어갔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위해 예정하시고 그에게 지시하신 땅이었다. 그 땅은 창세기를 쓴 모세가 강조하고자 하는 땅이었다. 모세는 그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땅이며 이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땅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장은 가나안 땅을 여러 번 언급한다. 5절,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11:31,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아브람은 가나안 땅 중부,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다. ‘상수리 나무’라는 원어(엘론)는 테레빈스(terebinth) 나무라고 한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함의 아들 가나안(창 9:22)의 자손이다. 그들은 후에 그들의 죄 때문에 완전히 멸망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창 15:16).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람에게 또 다시 나타나셨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특별한 방식으로 종종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기도 하셨고, 구름이나 불 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하셨고, 또 자신의 음성으로나 기적들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셨다. 이때는 아마 그가 직접 나타나신 것 같다. 하나님의 이런 직접 나타나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요 1:14; 14:9).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는 지구의 한 지역을 누구에게 주실 권한이 있으시다. 그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통치자요 주인이시므로(시 24:1) 그럴 권한이 있으시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느니라.” 신명기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았다. ‘단’이라는 원어(미즈베아크)는 ‘[짐승을] 잡아죽인다’(자바크)는 말에서 나왔다. 그것은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었다.
[8-9절]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네게브](NASB, NIV)으로 옮겨 갔더라.
아브람은 그곳에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거처를 정하고 장막을 쳤고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노아가 홍수가 그친 후에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것과 같았다. 짐승 제사에는 하나님의 긍휼로 예비하실 속죄제물을 믿는 뜻이 있고 또 참된 헌신과 순종을 다짐하는 뜻도 있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배와 기도의 삶, 곧 경건한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셋의 아들 에노스의 삶이었고(창 4:26), 에녹의 삶이었고(창 5:22, 24), 또 노아의 삶이었다(창 6:9, 2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의 저장소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며 규범이다. 성경 외의 다른 계시를 구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잘못이다.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사람은 성경보다 하나님의 현재적 직접 계시에 무게를 두게 되고 그것은 마귀의 미혹에 떨어지는 길이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누가복음 16:29, 31,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우리는 날마다 성경 읽기를 힘쓰고 성경을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상숭배의 세상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한다. 우리는 불경건하고 음란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고 부도덕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과 함께 멸망을 받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오늘날 약속의 땅은 세상에서는 교회이며 장차 들어갈 영광의 천국이다. 죄인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들 속에 오셔서 그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며 그들을 도우셔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육신의 죄성과 싸워 이겨야 하며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정상적인 삶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하나님께 단을 쌓는 일을 힘썼다. 그것은 경건한 삶이며 예배하는 삶이다. 우리가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교회에 들어오고 천국을 소망하게 된 후,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힘쓰고 기도하며 찬송 부르고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첫 번째로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가장 귀히 여기자.
10-20절,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감
[10절]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인도하셔서 거하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 우거하려 하였다. 기근은 보통 하나님의 징벌로 온다. 아마 그 땅 거주민의 죄 때문에 기근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살던 아브람의 가족들에게도 타격이 왔다. 아브람은 사람의 일반적 생각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은 나일강 하류에 비옥한 땅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므로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거하라고 명하신 땅에 머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 염려와 지혜와 판단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낭패의 길이었다. 사사시대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도 비슷한 생각으로 흉년을 피해 유다 땅을 떠나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했다가 낭패했었다(룻기).
[11-12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아브람은 애굽에 가까이 왔을 때 한가지 걱정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믿음으로 행하면 담대함과 평안이 있지만,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행할 때는 염려와 걱정이 생긴다. 아브람의 걱정은 죽음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의 보기에 그 아내 사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기 때문에, 아브람은 애굽 사람이 자기의 아름다운 아내를 보고 자기를 죽이고 자기 아내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낯선 땅에 우거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생각과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를 도우시고 지키실 것을 모르는 생각이었다.
[13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은 그런 상황에서 한가지 인간적 대책을 생각하여 아내에게 요청하였다. ‘원컨대’라는 표현은 아브람이 그 옛 시대에 평소에 아내에게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고 인격적이고 사랑을 가지고 대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아내에게 사람들에게 “나는 그의 누이라”고 말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는 아내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만용(蠻勇)을 부리지 않고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인간적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래가 그의 누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래는 그의 누이였으나 지금은 그의 아내이다. 아브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거짓말은 악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두려운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경건한 아브람의 연약한 모습이었다.
[14절]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아브람의 예상대로 애굽 사람들은 그의 아내 사래의 심히 아름다움을 보았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났을 때 75세이었고(창 12:4)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차이가 10살이므로(창 17:17),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사래의 나이는 65세 이상이었는데도 그 여자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의 창조 세계의 본래의 모습이다. 아름다움의 주된 한 요소는 조화로움이다. 사람의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그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아름다움은 음란함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인격성과 도덕성과 단정함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15절]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애굽 왕 바로는 대신들의 칭찬을 듣고 사래를 궁으로 취하여 들였다. 아브람은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려고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 아내를 빼앗기는 슬픔과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행하는 대신에 인간적 지혜와 판단으로 행했을 때 큰 것을 잃어버렸다.
아브람의 슬픔과 낭패는 하나님의 징책이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마치 훗날에 엘리멕렉과 나오미 가족의 경우와 같았다. 룻기 1:3-5에 보면, 기근을 피해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간 나오미는 그곳에서 남편을 잃었고 자신의 두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얻었으나 그곳에 거한 지 10년 즈음에 두 아들도 다 죽었고 두 며느리와 함께 남겨졌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말했다(룻 1:13). 또 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후 이웃 사람들에게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했다(룻 1:21).
아브람은 처음부터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실했을 것이며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응답을 얻었을 것이다. 후에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1,754명의 유대인들을 인도하여 파사 나라로부터 유대 땅으로 돌아오고자 했을 때 길에 대적들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군대의 지원을 요청치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고(스 8:21-23) 무사히 잘 도착하였다.
[16절]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애굽 왕 바로는 사래를 인해 아브람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비록 아내 대신 양과 소와 남녀 종들과 암수 나귀와 약대를 많이 얻었지만, 그것이 아브람에게 무슨 기쁨과 복이 되었겠는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아브람은 비로소 애굽으로 내려오려 했던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기근이 있었더라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래 때문에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그것은 아마 무서운 질병이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큰 재앙을 내리셨는가? 그것은 바로의 행위가 간음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하고 중요한 제도이며 그것을 어기는 것은 간음죄가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며 결혼 관계를 잘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미워하시며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말 2:16). 더욱이, 사래는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의 아내이며 남의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될 자이었다.
[18-20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원문)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바로는 그 재앙이 사래 때문에 온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서 옳지 않은 일에 가책을 느낀다. 살인, 간음, 도적질이 죄악임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은 양심 때문이다. 요나의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선원들은 그 재앙이 누구 때문에 왔는지 알기를 원했다(욘 1:7). 헤롯 왕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려 하였고 또 그의 말을 들을 때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막 6:20). 그들은 다 양심의 음성을 들은 것이었다.
바로가 양심적으로 두려워하고 사래를 돌려보낸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이었고 긍휼하신 간섭과 도우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빼앗겨 슬퍼하며 낙심했을 아브람을 위해 비상하게 개입하셨고 그를 도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며 선한 뜻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롬 8:28).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기근이 있다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자. 우리는 질병과 궁핍과 각가지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고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자.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안에 거하고 참된 교회 안에 거해야 한다. 그곳이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평안과 기도 응답과 그의 보호하심이 있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망하여 세상으로 가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목숨 때문에 거짓말하지 말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범죄치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우리는 죽음을 겁내어 비굴하게 거짓말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섭리를 믿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실수를 용서하시고 그를 도우시고 구원하셨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했다(시 23:4). 시편 91:1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말했고, 시편 121:8은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롬 8:28) 하나님을 믿자.
13장: 롯과 헤어짐
[1-2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銀金)이 풍부하였더라.
아내를 빼앗겼다가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으로 다시 찾은 아브람은 그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애굽에서 나와 남방으로 올라갔다. ‘남방’(네겝)은 유대 땅의 가장 남쪽 지역 즉 사해(혹은 염해)의 서남쪽 지역을 가리킨다. 아브람은 애굽의 왕에게 양과 소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기 때문에(창 12:16) 육축이 풍부하였고 또 은금도 많았다. 아브람은 물질적으로 부요하였다.
[3-4절]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은 벧엘에 이르렀고 벧엘과 아이 사이, 즉 전에 하란에서 이곳 가나안 땅에 와 장막을 치고 처음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고 기도했다는 뜻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단 쌓기를 힘썼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고 기도하기를 힘썼다.
[5-7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과 롯은 각각 소유물이 많아 그곳에 함께 거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기도 했다. 사람은 더불어 살고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만, 때때로 제한된 땅과 음식물로 인해 다툼이 생긴다. 가난과 불편함을 참고 이기는 것이 사랑이며 성숙한 인격이지만,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 다툰다.
[8-9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우리가 한 골육이니 서로 다투지 말고 헤어지자고 제안하였다. 함께 있으면서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위하고 사랑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사람의 연약성 때문에 때때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 간에도 부득이 서로 헤어지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서 서로 다투는 것보다 헤어져서 서로 다투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브람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다. 아브람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는 양보심을 발휘했다. 사람의 다툼은 대체로 욕심 때문에 온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했다(약 4:1-2).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며 그 나라에 소망을 둔 자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에 욕심부리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다투지 않는다. 사람은 세상적인 욕심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천국만 가장 큰 가치로 알 때 세상 것들을 양보할 수 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 요단 들은 사해로 이어지는 요단강 주위의 들판을 가리킨다. 요단 들은 소알까지 비옥했다. 소알은 소돔과 고모라의 이웃 도시이었고 사해 남단에 위치했던 것 같다.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후에는 황폐하여졌으나 그 당시에는 비옥하여 여호와의 동산 곧 에덴 동산 같고(창 2:8; 사 51:3; 겔 28:13) 애굽 땅과 같았다. 에덴 동산에는 강들의 근원들이 있어서(창 2:10) 비옥하였고 애굽 땅도 거대한 나일 강을 인해 매우 비옥하였다.
[11-13절]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은 요단 들을 택했고 아브람을 떠나 동쪽으로 옮겨갔다. 그는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 소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다. 죄도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다. 사람이 약해서 실수로 혹은 알지 못하고 짓는 죄는 작은 죄이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도전적으로 짓는 죄는 큰 죄이다. 사람의 양심은 고의적인 죄를 어느 정도 통제하지만, 죄가 반복되고 양심이 무디어지면 그는 고의적인 죄를 담대하게 짓게 된다. 소돔 사람들은 큰 죄인이었다.
롯이 요단 들을 택하고 소돔 성 가까이에 장막을 친 것은 신앙적이지 못했다. 그는 물이 넉넉한 땅이라는 현실적 유익만 생각하여 그곳을 택했고 그가 살 곳이 그의 경건 생활에 얼마나 유익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만일 그가 바른 생각을 했다면, 그는 죄악된 환경을 멀리했을 것이다. 죄악된 곳에는 하나님의 재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롯과 달리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하였다.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다(창 12:7). 그는 얼마 전 기근 때문에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낭패를 경험했다. 그것은 그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하였다.
[14-17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직접 혹은 환상 중에나 밤에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는 아브람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가나안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이 그와 그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땅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다. 둘째는 그의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아브람의 자손들은 수적으로 번창하게 될 것이다.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상수리 수풀’이라는 원어(엘로네)는 ‘테레빈스 나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그것은 그가 짐승 제사를 드렸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받은 죄사함의 은혜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각오를 상징한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것은 인간의 합당한 삶이요 복된 삶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4절,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8절,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송하며 기도했고 속죄 신앙을 가졌다고 보인다. 아브람의 경건한 삶은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복된 삶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23). 또 그는 이 세상의 종말과 그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신 후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눅 21:36).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교훈하였다(히 13:15). 또 시편 1편의 저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했다(시 1:1-3).
둘째로, 우리는 아브람에게서 양보심을 배워야 한다. 아브람은 그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해결하려 했을 때, 양보심을 발휘하였다. 그는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전 1:2). 사람이 세상 것에 욕심을 내면 다투지만, 하나님과 천국에 가치를 두면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다. 주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남을 긍휼히 여기고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5, 7, 9), 또 악한 자들이나 원수들에게도 선을 베풀라고 하셨다(마 5:39-44). 사도 바울도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교훈했다(롬 12:10, 17-18). 또 그는 “너희 관용[혹은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했다(빌 4:5).
셋째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죄악된 환경을 피하자. 롯은 요단 들에 물이 넉넉함 즉 물질적 유여함이라는 조건만 보고 거주지를 선택하였다. 그는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거주지나 친구들을 조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우리는 참 교회를 세우고 그 안에서 교훈을 받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교제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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